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알 아문센 (문단 편집) === 최후 === 1928년 5월, 노빌레는 자신이 제작에 참여한 이탈리아 호라는 비행선을 타고 북극점으로 갔다가 조난당했다. 북극 통과 비행은 마쳤으나 북위 81도 선상에서 이탈리아 호가 추락하여 조난당해버린 것이다. 당시 노빌레는 아문센이란 이름에 가려진 것에 불만을 품고[* 사실 당연한 게 노빌레는 비행선 노르게 호의 선장이자 탐험대의 일개 대원에 불과했다(사실 그보다는 고용된 선장이었다는 게 더 맞는 말이겠지만...). 그러나 탐험대장은 누가 뭐래도 아문센이었고 모든 것이 아문센의 계획과 지휘 하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노빌레는 노르게 호를 이탈리아에서 만들었다는 이유로 자기 권한을 넘어서 탐험에 간섭하려 드는 등 지나친 월권행위를 해댔다.] 아문센이 없더라도 나홀로 대장으로서 얼마든지 북극점에 간다고 하여 무리하게 계획을 추진했다. 이를 본 무솔리니는 아무래도 너무 성급해하는 것 같으니 일단 보류하라고 요청하지만 노빌레는 이를 묵살하고 출발했다. 그리고 무솔리니는 분노하여 그가 조난당하자 자업자득이라며 아예 모른 척했다. 1928년 5월 25일, 한 환영파티에서 아문센은 노빌레가 비행선 "이탈리아 호"와 함께 추락했다는 사실과 생존자들이 보내온 최초의 조난 신호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노빌레가 보낸 조난 신호를 보고, 영국과 미국과 노르웨이, [[소련]]까지도 노빌레를 구조하려고 하였다. 약 300척에 달하는 배와 비행기가 실종된 이탈리아 호의 승무원들을 찾는데 총동원되었다. 무솔리니도 태도를 바꾼다. 노르웨이 측이 이탈리아와 합동으로 구조대를 보내기로 하지만 무솔리니는 '''노빌레가 아문센에게 구원받는 건 불쾌해 할 테니 그를 빼버리지 않으면 같이 못 간다'''라는 억지 요구를 하여[* 사실 무솔리니도 아문센을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위에 나온 노르게 1호 때의 일이 컸다.] 라르센이 대신 노르웨이-이탈리아 합동구조대장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자 아문센은 이번에는 자신이 성급하게 일을 서두르면서 결국 자신이 죽게 되었다. [[프랑스]] 측에서 뒤늦게 [[https://en.wikipedia.org/wiki/Latham_47|라탐 47(Latham 47)]] [[비행정]]을 제공하자, 프랑스 팀 구조대장으로 나서서 구호품을 두둑히 비행기에 싣고 노르웨이 트롬쇠를 떠나 기꺼이 북극점으로 갔지만 문제가 심각했다. 조종석이 노출된 [[복엽기]] 라탐 47형 비행정은 추위에 약해서 극지방 비행은 무모했다. 게다가 사흘 내내 비행기 조종사들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피로와 악천후에 시달리며 비행해야 했다. 어처구니없게도 스콧의 최후처럼 아문센도 이런 무모한 준비를 하면서 비극적으로 최후를 맞게 된 것이다. 1928년 6월 18일 오후 4시쯤, 바렌츠 해에서 그가 탄 비행기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후 아문센은 '''돌아오지 않았다.''' 노빌레는 나중에 구조되었지만, 아문센은 끝내 구조되지 못했다.[* 앞서 아문센/스콧 논쟁에서 있었던 이야기가 아문센/노빌레 논쟁에서도 똑같이 벌어졌다. 즉 스콧을 버린 비열한 아문센에 대한 영국에서의 이미지가 반대로 아문센을 버린 비열한 노빌레에 대한 노르웨이에서의 이미지로 바뀌게 된 것. [[숀 코너리]]가 아문센 역으로, [[피터 핀치]]가 노빌레 역으로 분한 영국-이탈리아-소련 합작 영화 '레드 텐트'는 바로 이런 이미지에 관련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위대한 탐험가의 실로 허무한 최후였던 것이다. 과거 남극점 정복 경쟁에서 패해 아문센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영국에서는 그의 죽음을 접하고는 '''[[혐성국|사망]] [[고인 드립|축하 파티]]'''까지 연 바람에 여러 국가에서 비난을 받았다. 반대로 노르웨이에서는 국왕이 대리인을 보내 자국의 영웅이자 위대한 탐험가였던 아문센을 추모하며 국장으로 성대한 장례를 치러 주었다. 1928년 8월 30일, 쿠에르 연안 항해용 소형 동력선인 브로드 호가 투쉬보그에 못 미친 지점에서 라탕 기의 활주 부품 조각을 발견하고, 1928년 10월 13일 레이프 호가 라탕 기의 연료통을 발견했다. 그것이 아문센의 마지막 흔적으로,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아 지금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아문센은 아무래도 첨단 비행기 조종이나 그쪽에 대해선 무지해서 그런지 개썰매 같은 탐험 때와 달리 준비를 철저하게 하지 못한 게 화근이었다.[* 그가 남극점 정복 당시엔 철저한 준비로 인해 매우 수월하게 탐험을 하며 대원 모두의 안위까지 보장하며 귀환했다는걸 고려해보면 참 아이러니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또는 스콧과 관련된 트라우마 때문에 서둘렀다는 설도 있다. 아문센은 스콧의 죽음에 부채의식을 느끼고 있었고, 이 때문에 노빌레를 내버려둘 수 없어서 구조 비행을 서둘렀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문제가 아니라도 기본적으로 조난이라는 상황은 시시각각 생명이 위협당하는 상황이고, 노빌레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 지는 아문센으로서는 알 수 없으므로 최대한 서둘러 구조해야 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1928년 6월 23일, 노빌레는 원래 25명이었던 팀원 중 단 6명과 함께 스웨덴 출신의 조종사 룬드보리와 쉬베리에게 구출되었다. 7월 12일에는 나머지 이탈리아 출신 생존자들이 [[소련 해군]]의 [[쇄빙선]]에 구출되었다. 살아 돌아왔지만 노빌레의 말년 역시 평탄하지 못했다. 아문센을 시기해 무모하게 준비도 제대로 안하고 성급하게 출발했다가 아문센을 죽게 했다는[* 아문센과 노빌레의 분쟁에서 아문센에게도 문제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경우 진짜 문제는 노빌레였다. 노빌레는 자신이 노르게 호의 선장임을 내세워 항상 아문센의 결정에 간섭하려 했다. 하지만 베테랑 중의 베테랑 탐험가였던 아문센과 젊은 노빌레 간의 차이는 매우 컸다. 무엇보다도 선장인 노빌레가 탐험대장인 아문센의 일에 간섭하는 건 아무래도 월권행위에 가까웠다. 아문센의 사망 역시 원인은 노빌레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비난에 시달렸다. 게다가 자기 명령을 무시하고 가 있던 그를 무솔리니는 재판까지 세워두며 모욕을 주었다. 거기다 수사 과정에서 노빌레의 실수로 비행선이 추락했고, 노빌레가 구조를 받을 당시에 자신의 팀을 사고 장소에 그대로 남겨두었다는 것이 밝혀져서 군인으로서 비겁자라는 오명까지 드러나 더욱 치욕을 당하고 말았다. 더불어 육군에서도 불명예 전역당했기에 [[연금]]도 전혀 받을 수 없었고 [[이탈리아 왕국|이탈리아]]의 수치라는 이탈리아 언론 보도까지 나오면서 아내에게 [[이혼]]당하고 친척들에게도 외면되었다. 노빌레는 1931년에 소련으로 가서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의 요구대로 비행선을 만들며 살아갔다. 그러다가 1939년에 미국으로 가서 살았는데 그냥 조용하게 숨듯이 살았다. 그리고 무솔리니가 몰락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조국 이탈리아로 돌아왔지만 조용하게 살았고 1970년대 언론이 인터뷰를 하러 찾아오자 화를 내면서 아무 말도 할 게 없다고 내쫓았다. 그렇게 살다가 극소수 지인들이 보는 자리에서 아문센이 죽은 지 딱 50년 지나, 1978년 93세 장수를 누리며 세상을 떠났지만 그다지 반갑지 않은 장수였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